점심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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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몰 안을 한참 돌아다니다보니 맹렬한 허기가 찾아왔다. 기내식을 다 챙겨먹고 맥도날드에서 푸짐한 아침식사를 했는데도 말이다. '내 뱃속에 기생충 혹은 외계인 가설'에 조금 더 확신이 생겼다. 점심식사는 몰 안에 있는 Grill'd Healthy Burger라는 곳에서 하게 되었다. 맛집 검색을 해서 찾아간건 아니고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걷다가 발견한 곳이었다. 맛집 검색 서비스로 미국에는 Yelp, 한국에는 다이닝코드가 있는데 호주에는 뭐가 있을까 해서 찾아봤더니 Yelp 호주판이 있었다.

식품의 열량을 표시하는 단위가 kcal (킬로칼로리)가 아니라 kJ (킬로줄)이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위를 보지 않고 숫자만 보았을 때에는 숫자가 매우 커서 당황스러울수도 있지만, 1,000kJ이 약 239kcal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을 듯 하다.

포트 맥쿼리

원래 계획은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브리즈번까지 운전해서 가는 것이었지만, 밤샘 비행 후 피곤하기도 하고 점심을 먹고 출발해서 브리즈번까지 가면 숙소 체크인 시간이 너무 늦어질것 같아서 시드니에서 약 4시간 거리에 있는 포트 맥쿼리(Port Macquarie)라는 도시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포트 맥쿼리에 친구가 있는것도 아니고, 사전 조사를 해본것도 아니고 순전히 시드니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고, 괜찮은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정한 목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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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왼쪽 운전석에서 운전하다가 갑자기 오른쪽 운전석에서 운전 하려니까 차를 차선 중앙에 위치시키는 일이 꽤나 까다로웠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초보운전 시절로 돌아간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른쪽 운전석에 조금 적응할만하니까 이번엔 비가 오기 시작했다. 사실, 아까 브로드웨이 몰에서 나왔을때부터 조금씩 비가 오고 있었긴 했지만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졌다. 빗물이 자동차 앞 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속도를 충분히 낼만큼의 가시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상을 첨부하고 싶었지만, 새로 구입한 아이폰 7으로 영상을 찍어놓고 예전 폰에서 추출한 이미지로 덮어씌우기 전에 백업을 제대로 안 했는지 지금은 그 영상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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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타보는 차, 처음 가보는 길 정도는 그렇다 쳐도, 장거리 비행 후 피곤함, 반대로 된 운전석 방향과 통행 방향, 기상 상황 악화 등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초급반을 스킵 하고 중급반으로 바로 들어간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금방 적응했다. 역시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거센 빗줄기가 퍼붓는 와중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던게 하나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빗물이 매우 깨끗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수도권 지역에서는 비가 내릴 때 앞 차가 튀고 간 빗물이 내 차의 유리창에 묻으면 와이퍼가 움직이면서 잿빛의 구정물이 흘러내리지만, 여기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분명히 앞 차의 타이어에서 튄 물인데 말이다. 호주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 중 하나인 깨끗한 환경을 시각적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거센 빗줄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고 금방 날씨가 좋아졌다. 노면도 어느정도 말랐고 가시거리도 확보 되었으니 법적으로 허용된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서 포트 맥쿼리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집은 A1 고속도로에서 벗어나서 12km 정도 해안가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아주 조용하고 깜깜한 주택가였다. 시드니에서는 차량 통행량이 많으니 통행 방향이 반대라고 해도 역주행을 할 염려가 거의 없었는데, 포트 맥쿼리의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드니 인적이 매우 드물어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역주행 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구글 지도에서 친절하게 스트릿 뷰를 보여주긴 했지만, 주변이 너무 깜깜해서 그걸로는 어느 집인지 식별하기 어려웠다. 보통은 우편함이나 건물 벽에 건물 번호가 써있을텐데,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달이라도 떠 있으면 좋겠는데, 원래 달이 안 뜨는 날인지 아니면 구름이 잔뜩 끼어서 달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칠흑같이 어두웠다. 집집마다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없었다면 집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 같다. 헤드라이트 옆으로 퍼지는 불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 연석에 표시된 건물 번호를 보고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차를 세우고 현관문 벨을 누르니 '아만다'라는 이름의 온화한 인상의 친절한 중년 아주머니께서 나를 맞아주셨다. 2층으로 된 집이었는데, 1층에 차고와 게스트룸이 있고 2층에 거실과 부엌, 몇개의 방이 있는 구조였다. 게스트룸은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전용 화장실과 간단한 조리도구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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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짐을 내려놓자 아만다 아주머니가 게스트룸 사용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해 주셨다. 원래 말을 천천히 하시는건지, 아니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배려인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주머니의 말이 빠르지 않아서 호주 영어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때가 늦은 저녁 시간이었는데 아직 밥을 먹지 못했었다. Yelp에서 맛집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지역 주민이 추천해주는 레스토랑에 가보고 싶어서 아주머니께 주변에 괜찮은 레스토랑을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다섯개쯤 알려주셨는데, 그때 따로 기록을 해놓지 않아서 아쉽게도 어떤 레스토랑을 추천해주셨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문득 내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A: 호주에 온지는 얼마나 됐어?
B: 음…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네요. 아침 7시 40분에 시드니 공항에 착륙해서 시드니에서 조금 놀다가 곧장 여기로 왔지요.
A: 오 가엾어라! (Oh, you poor thing) 내가 오믈렛이라도 만들어줄까? 그러면 다시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B: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Actually, that will be much appreciated)
아만다 아주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오믈렛. 배고파서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대충 찍긴 했지만, 그 당시 내 마음속에 비친 오믈렛의 비주얼은 이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우와, 이렇게 친절한 호스트라니! 첫 시작이 좋다.

오믈렛을 다 먹고 나니까 시간이 저녁 일곱시 반쯤 됐었다.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기에 아주머니께 호주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겸 수다나 좀 떨까 하는 생각으로 빈 접시를 가지고 부엌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부엌에서는 키가 큰 아저씨가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내가 인사를 하자 아저씨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이름은 가이(Guy)이고 아만다 아주머니의 남편 되시는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이 집의 호스트 아저씨였다. 내가 사용한 접시를 씻으려고 하자 아저씨가 쿨하게 내 접시를 가져가시면서 말씀하셨다.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 그냥 두라고.

아저씨가 순식간에 접시를 닦고 나서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여행으로 왔는지 아니면 일 때문에 왔는지, 어디 가는 길인지, 얼마나 오래 있을건지 등등. 일단 내가 계획한 여행 코스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보니 어떤 계기로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셨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자세히 얘기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여행기 첫 편에 써놨던 것보다 조금 더 간략하게 설명해드렸다. 작년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받은 우수상 상품으로 해외 여행 참가권을 얻게 되었고, 회사에서 일정한 금액과 휴가를 지원해주는 대신 몇가지 조건이 붙어서 다른 여행 참가자들과 팜 코브에서 만나서 2박 3일간 같이 활동하기로 했고, 나는 시드니에서 케언스 공항까지 비행기 타고 가는 대신 앞뒤로 개인 휴가를 붙여서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 가이 아저씨와 아만다 아주머니도 마침 심심하던차에 잘 됐다고 생각하셨는지 나에게 과일을 권하면서 거실에 앉아서 얘기나 하자고 하셨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고자 할 때 쉽게 말문을 열 수 있는 유용한 질문들이 몇가지 있다. 무슨 일을 하는지, 형제는 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등. 답변의 내용에 대한 추가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가도 되고,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주면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2] 오늘은 내가 질문을 받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이러한 일반적인 주제가 아니라 북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북한 이야기는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주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북한에서 왔는지, 남한에서 왔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물론 알면서 장난으로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가끔은 나도 장난끼가 발동해서 West Korea에서 왔다고 얘기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상대방이 진짜로 믿으면 약간 곤란해진다. 우리가 먼 나라 이라크가 몇개의 주로 이루어져있는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 어딘지 잘 모르듯이 그들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는게 일반적이다. 다만, 북한은 전세계 뉴스에 하도 많이 나오니까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많을 뿐.

서울과 평양간의 거리가 200km가 채 되지 않고, 서울에 있는 우리 부모님 집에서 남북한 국경까지의 거리가 고작 30km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얘기해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흥미를 보인다.[3] 그 이외에도 북한 사람들은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로 남한 사람들만큼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다는 사실, 남북한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사실, 북한 인터넷은 나머지 세상과 단절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북한에는 인터넷이 없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주제이다.[4]

북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굉장히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아직 호주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어느새 호주 영어와 미국 영어의 차이에 대한 의견 교환의 장이 열렸다.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아이폰을 구매했던 얘기를 하다가 한국과 일본의 폰에서만 사진 찍을 때 소리가 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 이야기가 우리의 대화 주제를 호주와 한국의 양성평등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이끌었다. 여가 시간에 뭐 하는지 얘기하다가 원정코딩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어른들의 대화(?)에서 빠질 수 없는 부동산 시장 얘기도 했다. 내가 여행중에 열심히 기록한 여행 노트에 따르면, 평소에 무슨 책을 읽는지에 대한 이야기, 우리팀이 지금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 게임 듀랑고에 대한 이야기[5], 호주 북부에 있는 도시 다윈(Darwin)의 습하고 더운 기후와 악어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 등을 했다고 적혀있다. 다윈 얘기는 아마도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 지역에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가 있는데, 다음에 호주에 다시 방문한다면 그곳에 꼭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밤 10시였다. 두시간 반이 훌쩍 흘러간 것이었다. 대화가 재밌었지만 내일 갈 길이 멀기도 하고, 가이 아저씨도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오늘은 내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은데, 다음 목적지에서 호스트와 대화를 할 때에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Notes

[1]아직은 SKT로 인해 벌어들이는 돈보다 SKT에 지불하는 돈이 훨씬 더 많으니 당분간은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된다.
[2]물론 예외도 있다.
[3]이런 수치가 나오는 것은 개성시 남부에 있는 임진강이 남쪽 방향으로 돌출된 형태로 굽어 흐르기 때문이다. 개성시 동쪽 국경까지의 직선거리를 측정하면 조금 더 멀지만, 저가형 무기(?)로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4]몇달 전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북한 도메인 이름의 일부가 노출된 사고 덕분에 일부 북한 웹사이트들의 도메인 이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었다.
[5]언론 보도나 베타테스트를 통해 공개된 내용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방수가 되는 폰 장점 - 이건 나중에 쓰자) (혹은 호주의 인구가 한국의 절반인데도 불구하고 애플스토어 개수가 많은 것에 대한 이야기) (TODO: 아이폰 사진 넣기)

'생필품' 섹션 (TODO: 미국 마트 얘기 조금 더 써보기)